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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음악

바흐의 반체제적 음악관 — "J.S. Bach the Rebel"

by 박기자가 5분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2025. 10. 13.

서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 중 한 명이지만, 그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는 경건한 루터교 신자, 완벽주의적 장인, 그리고 바로크 음악의 정점을 이룬 보수적 거장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그러나 최근 음악학자들은 바흐를 "반체제적 예술가"(rebel)로 재조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바흐가 당대의 음악적 관습, 종교적 권위, 사회적 제약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예술적 비전을 추구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이 관점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흐를 단순히 전통의 계승자가 아닌 혁신가이자 실험가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바흐의 음악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그가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그것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바흐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갈등과 마찰을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닌 예술적 신념의 표현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 글은 바흐의 작품과 생애에서 나타나는 반체제적 요소들을 다각도로 검토한다. 음악적 실험과 형식적 전복, 종교 음악 내 해석적 자유, 개인적 갈등과 제도적 마찰, 세속 작품의 풍자적 요소 등을 살펴보고, 이러한 반체제적 관점이 바흐 연구에 주는 함의를 논의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해석의 한계와 과잉 해석의 위험성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바흐의 반체제적 음악관

반체제성 개념과 음악적 맥락

'반체제성'(rebelliousness)이 음악에서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정치적 반체제와 달리, 음악적 반체제성은 직접적인 체제 전복이나 혁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음악적 관습, 규범, 기대에 도전하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하며,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형식적 반체제성은 확립된 음악 형식, 장르 규칙, 작곡 기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거나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푸가 형식의 관습을 깨뜨리거나, 예상치 못한 조성 전환을 사용하거나, 극단적인 불협화음을 도입하는 것이다. 내용적 반체제성은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나 감정이 사회적·종교적 규범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종교 음악에서 과도한 감각적 표현을 사용하거나, 세속 음악에서 권위를 풍자하는 것이다.

18세기 초 독일의 맥락에서 반체제성은 특히 미묘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바흐는 교회와 궁정에 고용된 음악가였으며, 그의 생계는 후원자와 고용주의 만족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의 반체제성은 직접적인 저항이 아니라, 주어진 제약 내에서 최대한의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규칙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기보다는, 규칙의 경계를 시험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바흐 작품 속 실험과 전복적 요소

바흐의 반체제적 성향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The Well-Tempered Clavier)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었다. 24개의 장조와 단조 모두를 사용한다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다. 기존의 조율법으로는 일부 조성이 불협화음으로 들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몇 개의 조성만을 사용했다. 바흐는 평균율 조율법을 옹호하며, 모든 조성이 동등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 민주화의 선언이었다.

《푸가의 기법》(The Art of Fugue)은 바흐의 실험 정신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일한 주제를 다양한 대위법적 기법으로 변형하며, 푸가 형식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한다. 음악학자 Laurence Dreyfus는 바흐가 이 작품에서 "형식의 한계를 시험"하며, "규칙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완성 푸가는 바흐가 자신의 이름(B-A-C-H)을 음악에 삽입하며 자기 정체성을 작품에 각인하려 한 대담한 시도였다.

바흐의 악기법도 당대 관습에 도전했다. 그는 악기의 기술적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했으며, 연주자들에게 극도로 어려운 과제를 부여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단선율 악기로 다성 음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이는 악기의 전통적 역할과 한계를 재정의하려는 반체제적 태도의 표현이었다.

조성 전환과 불협화음 사용에서도 바흐는 대담했다.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Chromatic Fantasy and Fugue)는 극단적인 반음계적 진행과 예측 불가능한 조성 전환으로 청중을 당혹시켰다. 일부 동시대인들은 이 작품을 "과도하게 복잡하고 학구적"이라고 비판했다. 《마태 수난곡》의 도입 합창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규모와 복잡한 짜임새 역시 당시 교회 음악의 관습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부 교회 당국자들은 이러한 음악이 "예배를 방해한다"고 우려했다.

Dreyfus는 바흐가 "형식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형식의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고 평가한다. 바흐는 푸가, 코랄, 칸타타 같은 전통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지만, 그 내부에서 엄청난 변형과 실험을 수행했다. 이는 전통 내부에서 작동하는 혁명가의 전략이었다.

종교 음악 내 긴장과 해석적 선택

바흐의 종교 음악은 경건함과 대담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영역이었다. 예배 음악이라는 맥락은 엄격한 제약을 부과했지만, 바흐는 그 안에서 놀라운 해석적 자유를 발휘했다. 그는 성경 텍스트를 음악적으로 해석할 때, 문자적 의미를 넘어 깊은 감정적·신학적 층위를 탐구했다.

예를 들어, 칸타타에서 바흐는 특정 단어나 개념을 음악적 모티프로 표현하는 "음화법"(word painting)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내려가다"라는 단어에 하행 선율을, "올라가다"에 상행 선율을 배치하는 것은 일반적이었지만, 바흐는 이를 훨씬 복잡하고 상징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마태 수난곡》에서 예수의 말씀은 항상 현악기 반주를 동반하여 신성한 후광을 표현하는 반면, 다른 인물들의 말은 반주 없이 제시된다. 이러한 세밀한 음악적 신학은 단순한 삽화를 넘어 깊은 해석적 선택의 결과였다.

대비적 음악 처리 역시 바흐의 특징이었다. 그는 같은 칸타타 내에서 극단적인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대비시켰다. 이는 루터교 신학의 핵심 개념인 "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의 대비를 음악적으로 구현한 것이지만, 그 표현의 극단성은 때때로 교회 당국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바흐의 음악이 "지나치게 극적"이며 "오페라적"이라고 비판했다.

바흐는 또한 종교 음악에 세속 음악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는 자신의 세속 칸타타 음악을 종교 칸타타로 패러디(parody)하는 관행을 자주 사용했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많은 부분이 이전의 세속 칸타타에서 차용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실용적 이유도 있었지만, 동시에 세속과 신성의 경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바흐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개인 갈등, 권력 구조, 직업적 제약

바흐의 생애 기록은 권위와의 끊임없는 충돌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까다로운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예술적 신념과 직업적 제약 사이의 근본적 긴장을 반영한다. 아른슈타트 시절(1703-1707), 젊은 바흐는 교회 당국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그는 허가 없이 뤼베크로 여행을 떠나 4개월간 부재했고, 돌아와서는 "코랄 반주가 너무 복잡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국은 그에게 "회중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단순하게 연주하라"고 지시했지만, 바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뮐하우젠 시절(1707-1708)에는 교회 내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신학적 갈등에 휘말렸다. 바흐는 정교한 교회 음악을 선호했지만, 경건파는 단순한 회중 찬송을 옹호했다. 이 갈등은 바흐가 1년 만에 뮐하우젠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사직서는 "나의 음악적 목표를 달성하기에 이곳은 적합하지 않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 시절(1723-1750)에는 더욱 복잡한 권력 관계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시 당국, 교회 당국, 대학 등 여러 기관과 끊임없이 협상하고 때로는 충돌해야 했다. 1730년에 바흐가 시 당국에 보낸 유명한 각서 "적절한 교회 음악을 위한 짧은 하지만 필요한 초안"(Short but Most Necessary Draft for a Well-Appointed Church Music)은 사실상 고용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는 음악가들의 열악한 대우, 불충분한 예산, 무능한 학생들을 직설적으로 지적하며, 자신이 요구하는 음악적 수준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열거했다.

바흐는 또한 자신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여러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드레스덴 궁정과 연결을 유지하며, 라이프치히 당국에 대한 협상력을 확보하려 했다. 1736년 작센 선제후로부터 "궁정 작곡가"(Hofcompositeur) 칭호를 받은 것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라이프치히 당국에 대한 독립성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이었다.

세속 작품과 반체제적 태도

바흐의 세속 칸타타들은 그의 반체제적 면모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커피 칸타타》(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BWV 211)는 당대 사회 풍속에 대한 유쾌한 풍자이다. 이 작품은 커피를 마시려는 딸과 이를 금지하려는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커피는 18세기 초 라이프치히에서 새로운 유행이었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를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여겼다. 바흐는 이 칸타타를 통해 세대 갈등, 부르주아 가치관, 그리고 변화에 저항하는 권위를 유머러스하게 비판했다.

딸 리스헨이 부르는 아리아 "Ei! wie schmeckt der Coffee süße"(아! 커피 맛이 얼마나 달콤한가)는 감각적 즐거움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며, 금욕적 도덕관에 도전한다. 이 칸타타가 짐머만의 커피하우스(Zimmermann's Coffee House)에서 초연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커피하우스는 당시 새로운 공론장으로, 계급과 신분을 넘어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토론하는 공간이었다. 바흐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 연주회를 개최한 것은, 교회와 궁정이라는 전통적 음악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청중과 소통하려는 시도였다.

《농부 칸타타》(Mer hahn en neue Oberkeet, BWV 212)는 더욱 직접적인 사회 비평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작센 방언으로 쓰였으며, 농민들의 일상과 지역 영주에 대한 애정 어린 조롱을 담고 있다. 바흐는 민속 음악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고급" 예술 음악과 "저급" 민속 음악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렸다. 이는 음악적 위계에 대한 은밀한 도전이었다.

세속-종교 경계를 넘나드는 바흐의 태도는 그의 음악관을 드러낸다. 그는 모든 음악을 "하나님의 영광과 마음의 위안을 위한 것"(Zur Ehre Gottes und Recreation des Gemüths)으로 보았다. 이는 세속 음악과 종교 음악 사이에 본질적 구분이 없다는 급진적 입장이었다. 당시 많은 경건주의자들은 세속 음악을 죄악시했지만, 바흐는 음악의 세속적 즐거움을 긍정했다.

수용 역사와 반체제 해석의 변화

바흐에 대한 이해는 시대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바흐 사후 그의 음악은 한동안 잊혔고, 주로 교육용 자료로만 사용되었다. 19세기 초 멘델스존의 바흐 부흥 운동 이후, 바흐는 점차 "음악의 아버지"로 신격화되었다. 낭만주의 시대는 바흐를 초월적 천재, 경건한 신자, 독일 정신의 화신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바흐의 갈등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는 축소되거나 무시되었다.

20세기 초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바흐 연구는 바흐를 종교적·철학적 사상가로 해석하며, 그의 음악을 형이상학적 체계로 이해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은 바흐의 권위를 더욱 강화했지만, 동시에 그를 인간적 맥락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바흐는 완벽한 구조와 심오한 상징으로 가득한 작품을 만드는 초인적 존재로 그려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음악학자들은 바흐를 재인간화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신역사주의(New Musicology) 학자들은 바흐를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그의 음악에 내재된 긴장과 갈등을 탐구했다. Laurence Dreyfus, Christoph Wolff, John Butt 같은 학자들은 바흐의 실험 정신, 제도와의 마찰, 그리고 예술적 자율성 추구를 강조했다.

"J.S. Bach the Rebel"이라는 프레임은 이러한 재해석의 정점이다. 이 관점은 바흐를 단순히 전통의 완성자가 아닌,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변형시킨 혁신가로 본다. 바흐의 "반체제성"은 직접적인 저항이 아니라, 주어진 제약 내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미묘하고 지속적인 협상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비판적 검토 및 한계

반체제 해석에도 한계와 위험이 있다. 첫째, 과잉 해석의 위험이다. 바흐의 모든 음악적 선택을 반체제적 의도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많은 경우 그의 선택은 단순히 음악적 효과를 위한 것이거나, 실용적 필요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속 칸타타를 종교 칸타타로 패러디한 것은 시간 절약을 위한 실용적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사료의 한계이다. 바흐 자신이 자신의 예술적 의도나 철학을 명시적으로 설명한 문헌은 극히 드물다. 그의 편지나 문서는 대부분 실용적 사안을 다루며, 미학적·철학적 성찰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 자체와 간접적 증거에 의존하여 그의 의도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해석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를 크게 만든다.

셋째, 현대적 개념의 소급 적용 문제이다. "반체제"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적이며, 18세기 독일의 맥락에 직접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바흐가 살았던 시대에는 개인의 예술적 자율성이나 창조적 천재라는 낭만주의적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바흐는 자신을 "장인"(craftsman)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며, 우리가 부여하는 "반체제적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낯설었을 것이다.

넷째, 맥락의 복잡성이다. 바흐의 갈등이 항상 예술적 신념의 표현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일부는 경제적 이해관계, 개인적 자존심, 또는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또한 바흐는 많은 경우 체제 내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했으며, 권위와 타협하고 협력하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다섯째, 음악의 자율성 문제이다. 음악을 사회적·전기적 맥락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음악 자체의 미학적 가치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바흐의 푸가가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반체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과도한 맥락화는 음악의 음향적·구조적 측면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결론

바흐를 "반체제적 예술가"로 보는 관점은 그를 신화에서 역사로, 신격에서 인간으로 되돌려놓는다. 이 해석은 바흐의 음악이 단순히 완벽한 구조나 경건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제약과 자유 사이의 긴장, 전통과 혁신의 대화, 권위와 개성의 협상 속에서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바흐의 반체제성은 직접적 저항이 아닌 미묘한 전복이었다. 그는 형식을 버리지 않고 형식의 한계를 확장했으며, 규칙을 부정하지 않고 규칙이 허용하는 최대치를 탐구했다. 그의 실험은 파괴가 아닌 재창조였으며, 그의 갈등은 단순한 반항이 아닌 신념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바흐 음악의 역동성과 생명력을 이해하는 새로운 통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과잉 해석을 피하고, 사료의 한계를 인정하며, 음악의 미학적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바흐는 반체제적이기도 하고 보수적이기도 했으며, 혁신가이기도 하고 전통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복합성이야말로 그의 음악이 지닌 진정한 풍요로움이다.

향후 연구는 이러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면서, 바흐의 음악적 선택들이 그가 살았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더욱 세밀하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